[글쓴이 :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27일 대전 유성구 현중원 일대에서는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지역 방문에 맞서 초고압 송전선로 추진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시민사회의 항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주민들은 기자회견 이후 직접 장관을 만나 의견서를 전달하고, 주민 배제형 송전선로 추진 중단과 사회적 공론화 절차를 요구했다. 또 주민들은 환경부의 보여주기식 주민 소통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환경부는 최근 송전선로 입지선정 절차를 1개월 중단한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이후 어떤 방식으로 주민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마련하고 사회적 논의를 진행할지 전국대책위와 지역 주민대책위에 단 한 차례의 공식 협의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부 입지선정위원들과의 간담회를 추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주민 들러리 세우기일 뿐이다.

실제 이날 한국전력공사의 사업 설명 과정에 입지선정위원회 일부만 초대해 현장 설명회를 마치 주민 소통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려 했다. 갈등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대화라기 보기 어렵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최소한의 정치적 명분만 확보하려는 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송전선로의 타당성과 국가 전력정책에 대한 논의는 배제한 채 노선을 조금 조정하고 특정 마을을 피하는 미세 조정 수준의 협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왜 지역이 희생해야 하는가, 이게 본질

환경부 장관 방문 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대전환경운동연합

오히려 주민 사회 내부 갈등을 더 키우는 전략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개별 주민이나 일부 위원들과 따로 만나 노선 조정이나 보상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면, 결국 주민들은 공동의 문제 해결 주체가 아니라 서로 자기 지역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송전선로 문제의 본질인 ▲왜 수도권 산업 확대를 위해 지방이 희생해야 하는가 ▲왜 중앙집중형 전력체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분산에너지 대안은 왜 검토하지 않는가 같은 근본 질문은 사라지게 하려는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서는 한국전력공사의 왜곡된 보고 방식에 대한 항의도 이어졌다. 한국전력공사는 장관 브리핑 과정에서 마치 대책위가 송전선로 대안 노선을 제시한 것처럼 설명했다. 그러나 대책위는 대안 노선을 제시한 적이 없다. 송전선로 사업의 타당성과 절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노선을 어디로 우회할지 협상한 적이 없다.

한국전력공사 관계자가 김성환 장관에게 설명하는 모습
ⓒ 대전환경운동연합

정부와 한전이 주민 반대를 노선 조정 요구 정도로 축소하면, 송전선로 사업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라지고 결국 어디로 지나가게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실제로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정 지역 회피가 아니라 주민 동의 없는 일방적 사업 추진 중단과 원점 재검토다.

그런데도 한전이 대책위 의견을 왜곡해 보고한 것은 주민 의견을 사실대로 전달하기보다 갈등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한국전력공사는 이미 입지선정위원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기보다, 통제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일관해 왔다. 주민 대표성 논란, 정보 비공개, 일방적 회의 운영 문제 등이 반복적으로 제기됐지만 근본적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관계마저 왜곡한 보고를 하면 주민 사회에 더 큰 분노와 불신을 일으킬 뿐이다.

장관은 전기차 확대, 냉난방 전환, 전력수요 증가 등을 언급하며 “반도체 산업 때문만이 아니라 미래 전력수요 증가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설명을 반복했다. 또한 재산권과 조망권 문제를 언급하며 “누구도 자기 집 앞 송전선로를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도 이어갔다. 정부가 지역 사회의 문제 제기를 여전히 지역 이기주의로 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혐오시설 기피가 아니다. 왜 수도권 산업단지를 위해 지방이 위험과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왜 수도권은 전기를 소비만 하고 지방은 송전선로와 발전시설 부담까지 떠안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의 문제다. 주민들은 장관에게 “정말 전력이 필요하다면 수도권에 발전소를 짓고 지산지소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지금이라도 태도 바꿔야

현장에서 김재용 주민대표가 김성환 장관에게 의견서를 전달하고 있다.
ⓒ 대전환경운동연합

김성환 장관은 입지선정위원회 과정의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되돌리기 어렵다”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행정이 잘못되었다면 바로 잡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되었다면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최소 원칙이다. 그런데도 환경부 장관이 “문제가 있었지만 되돌리긴 어렵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결국 주민들에게 “이미 결정된 일이니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환경부는 적어도 주민을 대표하는 공식 대책위와 공개적으로 대화하고, 정보 공개 원칙 아래 사회적 공론화 절차를 다시 설계하며, 송전선로 필요성과 대안 가능성까지 포함해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 환경부 장관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다. 선거 시기 부담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갈등을 적당히 봉합하는 것도 아니다. 환경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은 잘못된 절차를 바로잡고, 주민들의 불신을 직시하며, 정책의 필요성부터 대안 가능성까지 사회적으로 검증하는 일이다. 그것이 행정이다.

우리는 일방 행정을 이미 수없이 겪어왔다. 보여주기식 간담회와 형식적 의견 수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환경부가 주민을 배제한 채 일부만 선별해 만나고, 송전선로 강행을 전제로 한 미세 조정 수준의 협의만 반복한다면 갈등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주민 사회 내부 분열과 불신만 더욱 커지고, 지역의 분노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환경부 장관은 지금이라도 태도를 바꿔야 한다. 주민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 결정의 주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대전환경운동연합 소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