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기사 읽어주기 재생볼륨 조절 바 열기지난 4일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신임 총재가 연설하고 있다. 교도 연합뉴스지난 4일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신임 총재가 연설하고 있다. 교도 연합뉴스

일본 집권 자민당이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재 체제를 본격 출범시켰지만 과거 파벌 세력과 비자금 비리 정치인을 당 전면에 배치해 시작부터 ‘개혁에 역주행’을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반발한 연립여당 공명당에서 벌써 ‘연립 탈퇴론’이 불거지면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 뒤를 이을 새 일본 총리 선출까지 지연되는 모양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9일 “다카이치 자민당 총재가 새 정부 출범을 위한 공명당과 연립틀 합의가 이례적으로 미뤄지면서 국회 총리 지명 선거가 20일 이후로 늦어질 전망”이라며 “물가 상승 대책을 포함한 추가경정예산안의 올해 안 처리가 어려워지고, 외교 일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다카이치 총재는 지난 4일 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뒤, ‘절대 강자’로 꼽히던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을 결선에서 꺾고 자민당 역사상 첫 여성 총재로 당선됐다. 이틀 뒤 그는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일본을 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다음 세대로 이어가겠다”며 “믿음직한 정당, 신뢰 가능한 정당, 국민의 불안을 꿈과 희망으로 바꾸는 정당이라고 느끼도록 해 자민당 풍경을 조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첫 인사부터 말썽이 일고 있다. 다카이치 총재는 취임 나흘 만인 7일 자민당 간부 인사에서 부총재에 아소 다로 전 총리, 간사장에는 스즈키 슌이치 전 총무회장을 임명했다. 총재 선거 때 자신을 지원했던 ‘아소파’에게 논공행상식 자리를 나눠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아소 전 총리는 이번 당 총재 선거에서 자민당에 유일하게 남은 ‘아소파’를 동원해 다카이치 총재에 조직표를 몰아준 뒤 부총재 자리를 받았다. 스즈키 간사장은 아소 전 총리 처남이다. 자민당 안에서는 선거 뒤 노골적 논공행상으로 ‘당내 정권 교체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불만까지 터져나온다고 한다. 아사히신문은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다카이치 캠프 쪽에서 ‘아소 전 총리의 힘을 빌려 승리할 수 있다면 (총재 당선 뒤) 당 인사는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까지 나왔다”며 “선거 뒤 노골적 보상이 이뤄지고 있으며 당 인사가 ‘아소 전 총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꼬집었다

또 스즈키 간사장을 보좌하는 간사장 대행에는 하기우다 고이치 전 정책조사회장을 앉혔다. 그는 다카이치 총재를 지지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옛 파벌 소속으로 아베 전 총리의 ‘복심’으로 불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해 사죄한 고노 담화에 대해 “껍데기만 남겨야 한다”고 2014년에 발언해 파문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자민당에 심각한 타격을 줬던 파벌 비자금 사건 연루 의원으로 당직 1년 정직 처분 전력이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자민당 핵심 요직인 ‘당 4역’ 가운데 정무조사회장에는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가 결선에서 다카이치 총재를 지지했던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 당 선거대책위원장에는 다카이치 후루야 케이지 전 국가공안위원장을 임명했다. 당 요직 대부분을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총재 캠프 일원으로 일했거나, 그에게 표를 몰아준 이들에게 몰아줬다. 총리 취임 뒤 내각에는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관방장관에는 키하라 미노루 전 방위상 등을 기용한다는 방침이다

또다른 문제는 국회 소수 여당으로 야당의 협조가 절대적인 상황에 연립여당인 공명당조차 다카이치 체제에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토 데쓰오 공명당 대표는 8일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꾸리는 데 필요한 협의가 결렬될 경우, 국회 총리 지명선거에서 다카이치 총재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인했다. 그는 “연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총리 지명 선거 투표지에 ‘다카이치 사나에’라고 쓰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사이토 대표는 지난 7일 다카이치 총재와 만나 태평양전쟁 에이(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과거사 인식 문제, 배외주의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민당 파벌 비자금 개혁을 위한 기업·단체 정치자금 규제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명당은 자민당과 연립을 했지만, 온건 보수를 지향하는 데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정당이다. 또 자민당 내 일부 의원들의 비자금 파문 여파 등 여파로 연립여당인 공명당마저 국회 의석 상당수를 잃은 바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일단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자민당 관계자 말을 인용해 “다카이치 총재가 오는 17∼19일 야스쿠니신사에서 열리는 가을 정기 대제 기간에 참배를 보류하는 쪽으로 조정에 들어갔다”며 “중국과 한국의 강한 반발,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외교 문제화하는 걸 피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자민당 쪽은 기업·단체 정치자금 규제 강화 요구에는 난색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이치 총재는 사이토 총재와 회담 뒤 “세 가지 의제 가운데 두 가지는 이해를 충분히 얻었는데 한가지는 과제가 남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다카이치 총재는 연립 조건의 하나로 차기 정부에서 이전처럼 공명당에 국토교통상 자리를 준다는 방침이지만, 상호 요구 사항의 최종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차기 총리를 선출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질 수 있다. 자민당으로선 가뜩이나 국회 소수여당인 처지에 26년 전부터 연립 정부를 꾸려온 공명당 지지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최악의 경우 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다카이치 총재가 기존 연립여당과도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면서 차기 총리 선출 일정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선 대개 총리를 겸하는 집권당 총재가 교체되면, 당·정 협의를 통해 새 총리 선출 일정을 결정한다. 애초 이달 중순께 새 총리 선출을 위한 임시국회 개최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공명당과 균열로 20일 이후로 연기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집권당 총재와 총리가 서로 다른 상황이 이례적으로 보름 넘게 이어지면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오는 26일부터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일,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아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 등 새 총리가 시급히 대응해야 할 굵직한 외교 일정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홍석재 특파원 [email protected]